Grace period

by. aimlesstravels (original link:  here)







임스가 생각하기에, 아서는 신이 내린 위대한 은총의 피조물이었다.

그리고 임스는 연기자이자, 카멜라온과 같았다. 항상 지켜보며 관찰하는, 주변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고, 그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자. 페이크란 본디 예술 행위였다. 본래의 것만큼 완벽해야함은 물론, 절대 단순한 수완도, 과소평가할 만한 기교도 아니었다. 흉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치 모네의 색감을 조화시킨 피카소와 달리의 그림 위에 앤디워홀을 곁들인 것과 같은 그것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달리 보이는 예술작이었다. 그리고 임스는 언제나 완벽히 재연해 보였다.

그의 시야에 처음으로 아서가 들어왔던 날, 무의식으로부터 튀어오른 말들이라고 한다면, 날카로운, 단호한, 깔끔한 등의 꾸밈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훌륭함이 있었다. 그 단정한 모습은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돔의 옆에 선 채로(마치 그의 입술 사이로 유혹의 말들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변함없이 올곧았다), 깨끗히 면도된 턱은 최고위층의 귀족과 같이 고상해보였고(그의 골격은, 이미 수없이 일류 귀족들 행세를 해온 임스로 하여금 왕족을 연상케 했다),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총을 그러쥔 그 손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노랫소리가 흐르는 불법 주류점의 금지된 위스키와 담배 연기로 그의 마음과 공상을 가득 채워 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자신이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일에 있어 신중하고 세심하게 계획된 세부사항들은 그에 대한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몇 몇 가지들은 놀랍기까지 했다(지금에 와서도). - 가는 몸임에도 무게있는 두 손과 그 무자비함, 가끔 흐트러지긴 하지만 기계와 같은 순발력과 무표정, 주인을 위해 덤벼드는 충견과 같은 잔인함.

그리고, 눈 앞에서 포인트맨이 움직였다.

임스는 4명의 거칠고 폭력적인 형들 밑에서 자랐다. 덕분에 어린시절은 주먹질과 난투에 대한 기억 뿐으로, 스스로 밟고 일어서지 못하면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 싸워주지 않을 거라 믿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분쟁들과, 살아남기 위해 택해야만 했던 도둑질과 거짓말에 의한 피할 수 없는 교전들의 증거로 그의 손은 흉터로 가득했다. 싸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이 좇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했던 일은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랑거리였다. 날카로운 주먹과 계산대로 맞아 들어가는 팔꿈치, 격렬하며 재빠른 그의 거친 움직임은 가차없이 싸움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아서는? 아서는 마치 춤추듯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날카로웠고, 그 날카로움은 또한 부드러웠다. 모든 힘과 제어력은 일을 완수시키기 위해서만 사용되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그 안의 새로운 자아가 튀어오르는 듯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정확했고, 짧은 그 하나에도 섬세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재빠른 움직임에 임스는 발레슈즈를 신고 무대 위를 가로 질러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는 근육으로 빚어진 그 유연한 몸은, 평형을 잡으며 공중에서 휘몰아치는 채찍과도 같아 보였다.

그렇기에, 헬기 밖으로 떨어질 때의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라는 건 전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 * - * -






"빨리요! 이러다 붙잡히겠다구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 위로 그녀는 조종사를 향해 소릴 질렀다. 그녀의 가는 목소리는 주변의 소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 대신 그녀의 표정이 그 뜻을 전해주고 있었다. 공포로 커다랗게 뜨인 두 눈과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입술. 얼굴 위로 정신없이 휘날리는 머리칼은 흡사 정신나간 미친 여자처럼 보였다. 또는 일주일간 머리를 빗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불쌍한 소녀의 꼴이랄까. 눈발이 어깨 위로 쌓이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중만 아니었다면, 임스는 아마도 잠깐 멈춰서서 수트 자켓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털어냈을 것이다. 이 꼬라지라면 분명 아서는 한마디 쏴붙일 것이 분명했으니까(그의 자켓은 언제나 다리미질에, 깔끔하게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마치 아리아드네의 경고에 마침표를 찍어주려는 듯, 총알들이 가까이서 빗발치듯 날아왔고, 임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Desert Eagle의 탄창을 갈아꼈다. "너랑 코브, 대체 무슨 짓을 해놨길래 저새끼들이 죽자고 달려드는 거지, darling?" 임스의 입에서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애칭이 흘러나왔다. 그건 습관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헬기 안의 반대쪽에 있는 남자에게 애정을 가지기에는 아무리 임스라도 무리였으니까. 그의 피묻은 손가락도, 아님 발가락, 그것도 아님 콧잔등이라도,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표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지랄맞은 눈보라 속의 피묻은 히말라야 산맥 위를 날아 오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지도(솔직히 말해서 층돌도, 추락도 하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후에 조종사에게 두둑히 팁을 얹어줄 것이다. 씨발, 이건 진짜 말도 안되는 짓거리였으니까). - 사실 이번 표적은 들었던 것과는 달리 한 명도, 평범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들은 코볼사 밑에서 일하는, 아님 다른 패거리들에 의해 고용된 어마어마한 수의 갱단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건 전부 코브의 탓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작은 공간을 가로질러 있는 아서는 그에게 시선하나 주지 않았고,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추적자들을 향한채, 그의 손에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분인 것 처럼 총이 들려 있었다. "원하는 걸 주지 않았으니까.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그래서 우린 그 일에서 손을 뗀것 뿐이야." 포인트맨은 간단히 대답했고,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마치 종소리처럼 뚜렷했다(그건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임스는 그가 말하는 걸 한번도 놓진 적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고, 임스의 뒤로 헬기의 후미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떨어지며 내지르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빌헬림의 비명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이번엔 네가 한 번 말해보시지, 임스." 드디어 아서가 몸을 돌렸고, 그의 차갑고 퉁명스런, 짜증섞인 시선이 임스를 향했다. "우리가 얼마나 저녀석들을 화나게 만든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눈빛과는 달리 더할나위 없이 차분했고, 안그래도 어른 남자 둘에 어린 여자 하나가 들어찬 좁아 터진 선실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있어 짜증이 난 마당에 그 말투는 이를 갈게 만들었다. 거세게 휘몰아 치는 눈보라의 추위는 뼛속까지 덜덜 떨리게 만들었고, 게다가 지금 이 상태로는 몸을 뒤로 빼지 않는다면 100퍼센트 총알받이 신세가 될 판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이 추출일이 끝나고난 후 도쿄를 갈 것인지 아님 라스베가스를 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상황과 장소를 반복하는 건 지루할 뿐이니까. 그리고 아서의 저 고상한 척 흉내내는 태도는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그는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만큼 참을 줄도 아는 사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참아 넘기며 조금 입을 벌리고 반대편을 바라본 순간, 혀를 깨물 뻔 했다.

아서는 무릎을 꿇은 채, 자켓을 벗어 아리아드네의 어깨 위에 걸쳐 주고 있었고, 그는 헬기의 문이 있어야할 열린 공간(잔인하게 쏘아대는 기관총 옆에서의 그 모습은 진짜 웃기지도 않은 것이었다)에 그의 쓰리피스 정장은 투피스가 되어 있었다. 젤이 풀린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얼굴 앞으로 휘날리며, 단추가 풀린 그의 조끼가 가는 몸 위에서 펄럭였다. 예리한 정확성과 고삐풀린 기술들은 잠깐 재워둔 그의 모습은 흡사 점잖은 매력과 장식적인 미사여구를 뺀 제임스 본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임스가 서둘러 할 말을 줄인 이유는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과 수척해진 두 뺨, 눈 밑으로 내려앉은 다크써클과 추출자와 포인트맨으로써의 역할을 동시에 도맡아버린 부담감에 그는 거의 죽은 사람마냥 지쳐 보였다. 목주변으로 베인 상처들에서 피가 스며져 나오며, 빳빳하게 풀먹인, 더이상은 하얗지 않은 그의 셔츠깃을 적시고 있었고,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몸을 떨었다.

- 그리고 총알들이 사방에서 날아 들어왔고, 그 중 하나가 아서의 관자놀이를 스치며 심홍색의 나선을 공중에 흐트러뜨렸다. 창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나고 동시에 포인트 맨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몸이 기울었다. 그 짧은 혼돈의 나락, 그 순간 그의 몸은 헬기 밖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순간, 임스는 숨을 멈췄다.

"아서!!" 아리아드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임스는 포인트맨을 향해 돌진해 팔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붉은 실크의 넥타이를 스쳤지만, 아서는 눈 앞에서 까만 점이 되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엎드린 채로, 여전히 그의 한 손은 아래로 펼쳐진 끝없는 공허 속을 향해 있었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쳐댔다.

처음만난 그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십수년간 그와 아서는 이 가식뿐인 게임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서로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언제나 손을 내밀면 포인트맨은 그 사이로 빠져나갔고, 그 또한 그 이상은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임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이렇게는 안된다. "돌려." 감각을 잃어버린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이 흘러나오고, 그리고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조종실 앞을 향해 소리쳤다. 절망과 분노와 후회로 뒤섞인 목소리. "돌리라고! 씨발!!"

"뭐요?!" 조종사는 소리치며, 미친 게 아니냐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페이크맨을 쳐다보았고, 임스의 눈동자는 눈 앞의 먹잇감을 둔 야생동물과 같이 위험한 빛을 띄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머리가 채 그의 생각에 따라갈 새로 없이, 그는 움직이고 있었다. 선실 천장에 끈으로 묶어 놓았던 구급 상자를 손에 쥐고 헬기의 뚫린 문을 향해 다가갔다.

"임스, 안되요!" 아리아드네의 팔이 그의 허리를 꽉 붙들었고, 그녀의 두 눈에선 이미 굵은 눈물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안되요! 가면 안된다구요!"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을 통틀어 가장 멍청한 짓이었고, 그의 인생 중에 있어서도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서였다. 그 하나의 단어가, 그의 모든 본능을 지배하고, 그에게 가라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또다시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임스는 아서에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나 우스울정도로 바보가 되버리곤 했다.

"가야만 해." 그는 속삭였고, 무한의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 * - * -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시끄럽게. 빌어먹게 짜증날 정도로. 바로 귀 옆에서.

짧게 신음하며, 코브는 팔을 뻗어 신경질적으로 램프의 스위치를 더듬어 찾아 on 버튼을 눌렀고, 갑자기 두 눈을 자극해오는 밝은 빛에 욕설을 내뱉으며, 전화한 녀석이 누구든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시계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씨발 새벽 5시 30분 이라고. 벨소리는 휴대폰에서 울리고 있었고, 그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극히의 소수로, 그 중 대부분은 대화의 에티켓이 무엇인지, 시차의 흐름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이 시간의 전화라면 중요한 용건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래야 할 것이다.

느린 호흡 사이로 투덜거리며, 전화를 귀로 가져가, 다소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코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청을 울리고, 그 누군가는 생각할 것도 없이 여자였고, 한창 울던 중 전화를 한 것인지, 콧소리로 이름을 불러왔다. 쨍쨍 울리는 목소리에 놀라 휴대폰을 귀에서 급히 떼어냈다. 방금까지도 쏟아지던 잠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딸이라면 '아빠'라 불러야 했고, 그 외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 여자들이라고 해봐야 제임스의 탁아소 친구들의 어머니들 뿐이었다. 편협한 인간 관계의 리스트를 주욱 훑는 중, 그는 다시 귀로 휴대폰을 대고 확실히는 알수 없는 신원미상의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아리아드네?"

"오 주여! 코브, 가버렸어요, 둘 다 가버렸다구요. 어떻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전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고 작아서, 코브는 만약 그녀가 지금 휴대폰으로 통화 중이라면, 그녀가 있는 곳은 분명 통화 수신율이 끔찍한 곳일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 뒤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영어인지 불어인지조차 알아 들을 수 없는 문장들이 멀리서 조급하게 들려왔다. 무엇보다 가엾은 그녀의 불안에 떠는 목소리는 코브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바지와 자켓을 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리아드네, 무슨 일이야?"

"일이요,"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또다시 눈물에 젖어 있었다. "계획적이었어요. 함정이었다구요. 당신과 아서를 노리고, 코볼사의 누군가가 꾸민 짓 같아요."

코볼사. 차갑게 얼어붙은 주먹이 내장을 내려치는 것 같아 코브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리아드네," 그는 설계자를 진정시키려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걱정과 혼란으로 다시금 그의 목소리는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서는 어딨어?"

아리아드네는 또다시 숨막힐듯 흐느꼈고, 그녀의 말들은 뒤죽박죽 엉킨채로 쉼표하나 없이 입밖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녀석들이 표적인 척 우리한테 접근했어요. 우리가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었는데, 아서는, 아서가 조사할 당시에 이치에 맞지 않는 게 있다고, 왜 하필 표적이 티벳에 있는 것인지, 그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어쨋든 그곳으로 향했고, 그리고 가까스로 빠져나왔어요. 거기엔 MEDEVAC 헬기가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우릴 쫓아왔고. 아서와 임스가 서로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아서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헬기 밖으로 떨어졌고, 그리고 임스가 그 뒤를 따라 뛰어내렸어요!"

아서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헬기 밖으로 떨어졌다. 순간 전신을 흐르던 모든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분노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야."

"어어-" 그녀는 훌쩍였다. "병원이예요. 무스탕에 있는. 네팔의."

"거긴 괜찮은거야?"

"잘..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부서졌고, 코브는 그녀의 눈가에 새로이 차오른 눈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익숙치 않은, 낯설기만 한 풍경. "그런 것 같아요." 그녀에게서 힘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조종사가 무사히 따돌린 것 같아요."

"알았어." 그는 이미 옷을 다 차려입은 상태였고, 이같은 새벽 시간에 아버지에게 연락해 아이들을 봐달라 부탁해야 함에 죄송한 마음을 삼켜 넘겼다. 아마도 "당신의 영리한 제자는 지금 네팔의 어느 빌어먹을 동네 한 가운데 쳐박혀 있고, 아서는 머리에 총맞고 헬기 밖으로 추락한 것 같아서 말이죠."라면 충분할 것이다. 어쨋든, 그의 아버지 또한 코브의 전 포인트맨을 맘에 들어하셨으니까. 맬이 그러했던 것 처럼-


"입양할까봐." 그녀가 농담조로 웃으며,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엔 등에 필리파를 엎고, 맨발로 뒤뜰을 이러저리 뛰어다니는 아서가 있었다. 그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고, 작은 손이 그의 조끼 뒤를 꽈악 움켜쥐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돔은 웃으며 그의 아내를 끌어당겨,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동그랗게 부풀어오른 배를 쓰다듬었다. "맬, 나도 좀 생각해 달라고?" 그는 장난스럽게 대답했고, 그녀는 딸의 얼굴에 떠오른 함박웃음을 보며 함께 웃었다.

"하지만 그 편이 나을 것 같아, 돔. 저 앤 이미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코브?"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에 낀 기억의 안개를 뚫고 메아리쳤고,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거기 꼼짝말고 있어, 아리아드네." 그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지금부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곧 바로잡을 수 있을거야."







- * - * -






언젠가의 인셉션 중 눈사태에 쳐박혀야 했던 그 꿈 속에서, 피셔는 분명 뭔가 굉장한 걸 가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임스는 지금 피곤에 지친채, 비참하리 만치 온 몸은 젖어 있었고, 무엇보다 추웠다.

그의 부츠는, 아리아드네의 유행에 맞춘 부츠보다, 스포츠용의 아서의 이탈리아제 로퍼보다, 몇 십배 더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지만, 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포인트맨의 가녀린 몸뚱이를 찾아내기 위해 빌어먹을 히말라야의 허허벌판을 끊임없이 이리저리 휘젖고 다니기에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켓을 입고 구급 상자로부터 붕대를 꺼내 체온 유지를 목적으로 손에 감아 쥐긴 했지만, 몇 백 미터 상공 위에서 뛰어내리는 건 절대 정상적인 착지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덕분에 그는 눈 속에 파묻힌채로 흠뻑 젖어버렸고, 그의 사기는 점점 더 바닥 깊이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곳만을 계속해서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붉은 태양은 이미 저 멀리로 떨어진지 오래였고, 까마득한 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설원에 눈이 멀어버린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바짝 죄여왔다. 그 모습은 그를 아주 오래 전의 과거로 데려다 놓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의 어머니의 비어버린 눈동자, 몇 날 몇 일이고 창밖을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을 연인을 기다리는 모습. 후에 그녀는 하얀 옷을 입고, 하얀 건물 안에 앉아,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하얀 가운의 의사들은 그를 향해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마음은 떠나버렸다고 말했다. 하얀 백지 상태로.

하얀색은 그들이 3번째로 일을 같이 하게 되었을 때, 아서가 입었던 정장의 색이었다. 임스는 뱃속 깊은 언저리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욕망과, 감히 이름 붙일 수 조차 없는 조용하고 낯설며 소중한, 잃음에 두려운 그 무언가가 서서히 그의 몸을 휩쓰는 열기를 마비시켜갔던 그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몇 년에 걸친 지금까지도.


"준비 다 됐어?" 코브는 더블 버튼의 턱시도와, 팔 안에 안긴 아름다운 맬과 함께 완벽해 보였다. "아서?"

"준비됐어." 포인트맨이 방으로 들어왔고, 임스는 입을 벌린채 다물 줄을 몰랐다. 맬은 그녀의 남편의 팔을 풀어내고, 아서의 나비 넥타이를 똑바로 손봐 주었고, 아서는 그녀를 향해 그저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임스의 한순간의 욕망의 빛은 전적으로 다른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아서는 임스의 곁을 스쳐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임스에게 시선하나 주지 않았고,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그리고 곧이어 맬과 코브가 따라 나섰고, 맬은 페이크맨 앞으로 조금 상체를 숙이고, 의미심장한 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러다 파리 들어가겠어.



그날 밤 일을 마치고, 그는 밖을 향했고 그 감정이 무엇이건 간에 가슴 위로 느껴지는 동통을 술로 잊으려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아서는 -완벽주의자에 지적이며, 이례적일 정도로 현실 안주를 꿈꾸는 포인트 맨- 자신과 같은 사람에겐 너무 과한 남자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입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임스는 연기자였고, 모방자이며, 동시에 진실과 같은 거짓이었다 - 그런 이유로 그는 요란한 색깔의,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곤 했다. 많은 사람들(아서를 포함해)이 페이크맨은 패션감각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임스가 비어있는 석판이자 백지 상태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존재와 호불호(好不好)로 그 안을 채우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는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그 어떤것도 돌려놓지 않았다. 남겨놓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빼앗는 자였으니까.  

모든 것들의, 모든 자들의 일 부분만을 취하여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서는, 그는 적어도 이보다 좋은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앗아가기만 할 줄 아는 자가 아닌, 조건없이 베풀 줄도 아는 자의 옆에서. 순백의 정장을 입은 아름다운 백기사와 같은 그를, 빳빳하게 풀먹인 깃의 새하얀 옥스포드 셔츠를 입은 그를, 의심할 여지없이 백합처럼 하얀 몸(물론 임스는 직접 본적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의 그를, 감히 자신의 손으로 더럽힐 수는 없었다.

하아. 온통 눈으로 뒤덮인 산맥 위를 헤매이는 것은 그를 감상적이게 만들었고, 독한 술 없이도 감정에 취하게 만들었다. 스노우모빌도, 스키도, 폭발도, 림보에 빠질 염려도,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 앞에 장애물이 될만한 것은 없었지만, 머리 속을 헤집어대는 생각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건 언제나 임스에게 있어선 떠올려선 안될 위험한 영역이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새하얀 설경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가며 걷기를 약 1시간 정도 되었을 때, 그는 새하얀 이빨도 우유빛의 색깔도 아닌 무언가를 발견했다. 눈 속에 남겨진 새빨간 흔적이라고 하면, 그건 물론, 아서가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증거겠지만, 그건 그 어떤 위로도, 위안도 될 수 없었다.

몇 미터 앞으로 눈덩이에 파묻힌 채로 움직이지 않는 아서를 보는 것 또한.

재빨리 눈 속을 기어, 그에게 닿을 때까지 무섭게 쌓아올려진 눈덩이들을 막무가내로 파헤쳐,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마 앞으로 쏟아져내린 그의 피로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기며, 손가락 마디로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그의 관자놀이에 난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 듬었다. 머리에 난 상처에선 욕이 절로 쏟아질만큼 피가 끊임없이 세어나오고 있었고, 그의 손가락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 직후 아서의 목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간 그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세어나왔다. 고동이 느껴졌다. -실같이 약하고 가늘었지만, 그 곳에서 확실히 박동하고 있었다.

"좋아, pet."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등 뒤로 구급 상자를 둘러매고, 무릎을 꿇어 아서의 몸을 한 팔에 둘러 껴안았다. 그리고 지금 하얀 눈 위로 아서의 몸이 그리는 그 선이, 젖혀진 고개 아래 드러난 그의 목덜미가, 새까만 석유방울처럼 창백한 두 뺨 위로 파르르 떨리는 그의 짙은 속눈썹이, 얼마나 매혹적인가를, 얼마나 우아한가를 생각지 않으려 애썼다. 죽음의 문턱에 선 그 고요함 속에서조차 그는 매혹적이며 우아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스스로에게 되뇌이듯이, 각인시키듯이, 아서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물론 아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내가 널 찾아냈으니까. 이제 괜찮아."

우연찮게, 공교롭게도, 다행히 - 이 세가지 단어의 조합은 그닥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어쨋든 -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동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입을 벌려 두 사람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까만 어둠, 그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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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상?"

지금 막 로버트 피셔 주니어의 기업 제정을 쪼개어, 각각의 주주들에게로 팔아치우려 그 상세 항목들을 검토하려는 중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책상 앞으로 늘어놓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문가에 당황한듯 서 있는 그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려보였고, 길고 폭이 좁은 스커트에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테의 안경을 쓴 채로, 이 직업을 하기엔 조금 너무 교육을 잘 받은 듯 해 보였다. 사이토는 물론 그녀의 이력서를 읽어 보았고, 자신과 같은 남자를 위해 일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큰 영광이어야 했지만, 그녀는 가만히 앉아 서류를 내밀고 전화를 받는 것보다는 내노라 하는 대학의 천체 물리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좀 더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가끔씩은 만약 그녀를 해고시킨다면 대학 등록에 관해 한번쯤 고민해 보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보고자 했지만, 곧이어 포기해버렸다.

그의 수하들 중 어느 누구도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림보에 갖혀 있던 그 시간 동안, 그의 정신 세계의 일부분이 망가져 버렸기에.

"무슨 일이지?"

그녀의 얼굴이 달아 올랐다. "방해드려 죄송하지만.." 밤 동안 걸린 전화에 대한 것은 그는 항상 무시해 버리곤 했기에, 어김없이 무시하고 있던 그의 전화를 그녀가 불분명하게 가리켰다. 사이토는 스스로 정한 규정에 따라 행동하길 선호하는 남자로, 보통은 그의 주변까지도 그에 따라 움직였다. 그의 새 비서는 확실히 이 일을 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분별력 또한 좋았기 때문에, 그 규정을 깨뜨린 이 연락은 필히 중요한 사안이어야만 했다. "코브라는 분이.."

그 즉시 그는 전화를 받았다. "코브."

"사이토." 코브의 목소리는 바짝 당겨져 긴장해 있었고, 사이토는 가늘게 눈을 뜨며, 조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하니 집안일로 상의할게 있어 전화한 건 아닐테고."

"부탁 좀 하겠습니다."

사이토는 웃었다. 얼마든지. 어쨋든 그는 빚지고 살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필요한 게 무엇인가, 코브."

"도쿄입니까?"

"물론."

순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리고, "네팔까지 얼마나 빨리 올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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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약 1시간 가량 이 곳에 앉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2시간, 어쩌면 3시간째 일지도 몰랐다. 시간의 흐름은 잊혀진지 오래였고, 신경쓸만한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발 밑을 내려다 봤다. 고급스런 가죽의 그녀의 부츠가 병원 복도로 늘어선 회색 바닥과 잿빛 벽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이 병원은 다른 어떤 기억보다도 감옥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곧이어, 이 또한 상관없었다. 두 장소 모두 죽음의 장소임은 틀림없었고, 한가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병원에선 소독약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녀의 부츠가, 푹 수그린채 앉아 있는 그녀의 플라스틱 의자를 탁탁 쳐대고, 손가락들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찻잔을 둘러 잡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조종사가(해리 뭐시기였나. 그는 말이 없는 편으로, 아서가 합리적인 수당을 약속한 후로는 그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고, 단 한마디 "그래서 언제 받을 수 있는겁니까?" 만을 물었을 뿐이었다. 임스는 웃으며 그가 맘에 든다고 했다) 걱정스런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탁-탁- 오른쪽 발 위로 빨간색의 반점이 찍혀 있었다. 아서의 피의 흔적. 탁-탁- 쥐고 있던 찻잔을 옆으로 내려놓고, 손안의 토템을 이리저리 돌리며 손끝으로 바닥 부근의 조각을 매만졌다. 탁-탁- 그녀는 이러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익숙한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꿈을 꿀 때면 언제나 들려오던 목소리였고, 초현실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준 목소리였다. 대성당을 세우고, 산맥을 쌓아 올리고,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줬던 목소리. "코브."

그는 복도 끝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사이토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덜덜 떨리는 발로 일어서며 조금 비틀거렸고, 곧이어 복도를 따라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부츠가 바닥을 밀어내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회색의 타일 위로 붉은 얼룩들을 흩뿌렸다. 붉게 탄 잿빛으로, 붉게 물든 잿빛으로.

그녀는 전에도 한 번 이와 같은 꿈을 꾼 적 있었다. 그 꿈에서도, 그녀는 남자를 향해 달려가, 그의 가슴을 계속해서, 계속해서 때렸다. 눈에서부터 뺨을 타고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시야가 부서져 내려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고, 아니 너무 화가 나, 스스로를 제어할 수조차 없었고, 마음은 산산조각나 있었다. 남자는 동상처럼 서 있을 뿐으로, 그녀의 화를 고스란히 받아내주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가슴에서부터 독처럼 퍼지는 아픔을 느꼈고, 그건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과 닮아 있었다.

꿈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아리아드네는 지금이 꿈과는 다른 상황이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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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darling. 여긴 안전해. 이제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리며, 자켓을 벗어 아서의 상처에 둘러진 붕대를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머리 밑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작게 한숨을 쉬며 그 옆에 주저앉아, 입안을 곱씹으며 어떻게 이 곳을 빠져나갈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서의 옷은 젖어 있었고, 그의 몸을 덥힐 방법은.. 그가 알고 있는 한 그 한가지 밖에 없었다. 다른 그 어떤 누구였다면, 그는 이미 바삐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 그가 하루에도 몇 십번씩 말하는 것 처럼, 이 부분에 있어서라면 그는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다른 그 어떤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아서였다. 뛰어난 실력에 부족한 상상력을 가진, 하얀 (방한복) 수트를 입은 백합처럼 하얀 몸의,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 아서였다.

그의 머리속에선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손가락들은 이미 분주히 포인트맨의 옥스포드 스타일의 셔츠 단추들을 풀고 있었다 -왜 항상 이딴 것들은 단추가 존나 많은거냐고?!- 그리고 아서의 몸을 앞으로 안아올려 그의 몸에서 옷을 벗겨냈다. 아주 오래전, 그때에도 임스는 이와 같은 상황이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땐, 사전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끝내주는 저녁을 먹은 후에 그가 가진 모든 매력을 쏟아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아서의 몸에 온기를 전해주기 위함일 뿐이었다.

아서는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웠다. 그리고 너무나 가늘었다. 마치 팔 안에 밀가루 푸대 하나를 얹어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절대 좋은 의미가 될 수 없었다. 임스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던졌고, 그 동시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둡고 새까만, 추악한 감정이 이성을 뚫고 격렬한 증오가 되어 스물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신할 추출자의 소개도 없이, 그의 포인트 맨만을 이렇게 남겨두고 떠나버린 코브가 증오스러웠고, 아서를 이렇게 만든 그 개자식이 증오스러웠고, 심지어는 고집세고, 강하고, 뭐든 견디려하는 아서 그조차도 미웠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지금 이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벗겨놓은 그의 조끼를 옆으로 치우려 했을 때, 그의 손가락이 조끼 안 쪽에 어울리지 않게 꿰매여져 있은 주머니에 와 닿았다.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포인트 맨의 심장이 있는 곳 바로 위쪽에 위치해 있는 그 주머니는 정육면체 모양으로 약간 튀어 올라와 있었고, 그는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며 조끼를 들어 비껴 놓았다.

그의 손가락은 아서의 바지 앞섭에서 갑자기 멈춰섰고, 그리고 시선을 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로 갑자기 열이 쏠리는 것만 같았다. 속으로 거친 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의 바지를 거의 찢어버릴 듯 급히 벗겨 냈다. 가능한한 어색하지 않게. 하지만 기분만큼은 지금까지 중 가장 병신같았다.

아서는 단단하지만 편안한 그의 가슴 위로 축 처진 몸을 눕힌 채로, 두 팔은 두 사람의 가슴 사이에 갖혀 있었고, 고개는 임스의 턱 아래 기대어 있었다. 그의 머리는 몰아치는 눈발에 젤이 풀려 축축히 젖어 있었고, 임스의 손가락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계속해서 빗어 넘겨주며, 다른 팔로 보호하듯 아서의 맨살이 드러난 등을 감아왔다. 그의 손바닥이 포인트맨의 어깨 위로 드러난 흉터로 남은 상처자국을 가볍게 스쳤고, 임스는 그 불완전함에 입술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흔적은 아서의 포인트맨에 대한 집념의 증거였고, 아니 어쩌면 대학 시설의 거친 파티로부터 얻은 기념물인지도 몰랐다(물론 그건 도련님 스타일의 그가 그런 종류의 재미를 서슴치 않고 즐길 타입이라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만약 그렇다해도 그는 절대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놀라움들, 언제나 그렇듯이).

이름붙일 수 없는 감정이 임스의 가슴 속에서 날개짓을 하기 시작했고, 꽉 막힌 비웃음의 첫 부분이 자괴감과 함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상의를 벗은 상태 그대로, 습기찬 거친 히말라야의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울화를 치미게 만드는, 흥미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포인트맨을 품안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았다. 지금까지 믿지도 않았던, 누군지도 모를 신을 향해 기도의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서의 피부 위로 흩어지는 호흡과도 같은 그 작은 속삭임은 금단의 세글자를 말하고 있었다. 어쨋든, 지금만큼은 아무도 듣지 못할테니까, 안그래?

하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가정일 뿐이었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가슴으로 천천히 전해져 오는 그 온기에, 아서는 미간을 힘없이 좁혀 살짝 눈커풀을 들어 올렸다. 임스는 반쯤 잊고 있었던 자장가를 조용히 흥얼거리고 있었고, 아서는 손가락을 살짝 말아쥐며 페이크맨의 쇄골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마치 미소를 지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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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그의 병원시설 또한 굉장했다.

하지만 그의 내과의들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아니었다.

임스는 예상보다 몇일간 더 침대 생활을 해야만 했고, 심지어는 동상의 참사로 인해서 또 다른 회복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게다가 사경을 헤맬정도로 지독한 폐렴에까지 걸려버린 까닭에 거의 일주일동안은 침대 위에 몸져 누워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병실을 수없이 들락거렸고, 대부분은 그의 옆에 앉아 있거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끔씩은 베게를 끌어안고 조그만 소리로 흐느끼기도 했다. 굵은 눈물 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베게 위를 적시는 것을 그는 보곤 했다. 코브는 그들의 '표적'이었어야 했던 그 빌어먹을 자식과 코볼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도미닉 코브가 은퇴를 했던 안했던 변하는 것은 없을 거라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었다 -만약 그를 열받게 만든다면, 그건 정말 유감스런 일이 될터였다. 특히나 10억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안에 쥐고 굴리는 거물이 그의 옆에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어느 날의 오후, 병실 안을 울리는 발소리에 페이크맨은 잠에서 깨었고, 그는 조각과 같은 가는 손가락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무릎에서 조심히 스케치북을 빼내어 옆으로 내려놓으며, 그녀의 등 뒤로 담요를 덮어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네가 잠든 내내 울고 있었을 거야."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임스는 두 눈을 몇 번 깜박이며, 피곤에 지친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 아무도 죽지 않았다면 그건 살아남은 자는 아닌거지, 안그래?" 눈을 가늘게 떠, 완벽한 차림의 남자가 침대 가까이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봤다. "게다가 넌 신의 은총인지 뭔지 덕분에 나처럼 몸져 누울 필요도 없었고 말이야."

아서는 침대 옆에 걸터 앉았고, 그의 팔이 임스의 팔을 살짝 스쳤다. 어두운 두 눈동자에 조용한 걱정의 빛을 띄운 채, 그의 입술 위로 즐거운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지 않아."

임스가 생각하기에, 아서는 확실히 신이 내린 위대한 은총의 피조물이었지만, 가끔씩 그는 재수없는 개자식이 되기도 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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