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phalalgia

by. aimlesstravels (original link:  here)







Headache (명사) : 잇달아 머리가 아픈 증세
               (구어적) : 걱정, 고민거리







I.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침대 매트리스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몸에 감겨오는 시트를 걷어내, 바닥 아래로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책가방과 학용품들을 넘어 문가로 다가갔다. "엄마?" 큰 소리로 외치며, 문고리를 잡아 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복도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엄마?"

비명 소리는 점점 낮은 신음 소리로 변해갔고, 그 사이로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복도 끝 엄마의 방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화장실을 향해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맨발로 딛고 서는 1월의 잔인한 겨울의 복도는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그들에겐 양말을 살 여유도, 심지어는 식료품을 살 돈도 없었다. 그의 비어있는 뱃 속은 꼬르륵 거리며 배고픔을 호소해 왔고, 그 소리는 오래된 화장실 문의 삐걱거림만치 커다랬다. "엄마?" 그는 조용히 부르며, 열린 문 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흐린 빛에 두 눈을 깜박였다. "괜찮아?"

샬롯 임스는 차가운 타일 위로 몸을 말아 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당겨 가슴앞에 모으고 가냘픈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의 욕의가 한 쪽 어깨 아래로 흘러 떨어지며 비참하리만치 가는 그녀의 몸을 드러내 보였고, 그녀는 발갛게 충열되고 부어오른 눈을 들어 그녀의 막내 아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올려보았다. 마스카라는 눈물로 번져 그녀의 뺨 아래로 길게 검은 줄을 그어내리고 있었고, 그녀의 발그스름한 블론디의 머리칼은 마치 말라버린 수풀더미처럼 엉킨채로 희미한 불빛 아래 무리를 두르고 있었다. "리차드?" 손 안에 꽉 쥐여진 티슈로 잔뜩 부은 눈을 닦아내며,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이야?"

심장이 조금 따끔거렸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욕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냐, 엄마. 나야." 한 번, 두 번, 심장 박동이 지나가고, 괴로운 숨을 참아 기다렸다. 그의 엄마의 피부 위로 깊게 새겨진 주름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이럴 때면 서른셋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녀의 비어버린 눈동자 안으로 빛이 떠오를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

"윌리엄," 그녀는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지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이리오렴, 아가."

그는 망설임없이 다가가 무릎을 꿇어 그녀의 품에 안겨, 그녀의 손에 들린 티슈를 다정히 잡아당겨 빼내었다. 그녀는 내려다보았고, 그녀의 두 눈동자엔 다정함과 청명함, 애정과 고마움, 그리고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하구나."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로 번져 흐르는 화장을 닦아주려 올린 그의 손을 그녀의 손이 감싸안았다. "미안해, darling."  

"엄마 잘못이 아니예요."

"넌 너무 말랐어." 그녀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뭐라도 먹지 않으련?"

샬롯은 집안 어딜 뒤져도 빵 부스러기하나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의 신발은 이제 발에 꽉 낄 정도로 작아져 있었고, 옷은 그저 호리한 그의 몸에 걸려 있어, 그 모습은 마치 허수아비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는 엄마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산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몇 시인지, 몇 일인지, 몇 년인지 조차 그녀의 마음 안에서 얽히고 뒤섞여,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그녀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로 밤새 침대 위에서 눈물로 울부짖으며 지새우곤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그건 정신분열에 가까웠다. 그는 심지어 몇 날 몇 일을 굶은 적도 있었고, 위장이 척추를 갉아내는 듯한 고통을 느낀적도 있었으며, 저혈당으로 인한 두통으로 제대로 잘 수조차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녀의 무관심에 그녀를 탓하며 그녀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 이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아뇨, 배 안고파요." 발로 바닥을 딛고 서며, 그녀의 손을 잡아 다정히 끌어올렸다. "일어나요, 엄마. 침대로 가요."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고, 어둠으로 둘러 쌓인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곳엔 벼락에 갈라지고 타들어간 오랜된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매년 봄이면 그 나무는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녹빛으로 물들곤 했지만, 그의 아빠가 매춘부와 도망간 이후로, 그의 첫째 형이 도랑에 얼굴이 쳐박힌 채로 발견된 이후로, 그의 둘째 형이 사라지고 엄마가 미쳐버린 그 이후로는 더이상 그 경치를 볼 수 없었다. 샬롯의 눈동자는 꿈꾸듯 흐려졌고, 그녀의 입술엔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마치 죽어버린 가지 위로 귀여운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있는 것처럼, 마치 이 세상이 전부 자신 것인 줄 알았던 22살의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연인과 함께 새 집에서 가족으로서의 새 출발을 꿈꾸고 있던 그 때처럼. 현실의 잔혹함 때문이 아닌 사랑에 미쳐버린 때로.

"올해는 꽃들이 늦게 피어." 느린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고, 고개를 돌려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조증 환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리차드?"

그는 잔뜩 긴장해버렸고, 그녀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손가락이 꽉 움켜쥐어 왔다. "엄마, 나예요. 윌리엄."

"왜 그럴까?" 그녀는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사랑스러웠던 표정은 어느새 분노와 증오로 변해 있었다. "내가 그보다 추악해서?" 손가락에 더욱 더 힘이 들어갔다. 내일이면 아마도 시퍼런 멍자국이 들 것임이 틀림없었다. "대답해! 이 나쁜자식!"

그는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으로, 숨을 참아, 감히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가버려." 돌연 샬롯은 쏘아붙이며,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돌아서서는 세면대 위에 기대어, 거울에 비친 그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버려. 나가. 당신따윈 필요없어." 마치 물에 빠져 흠뻑 젖은 사람처럼, 욕의의 끈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 그녀의 몸 앞으로 세게 잡아당겨 묶었다. "난 내 아이들이 있어. 그 아이들이 날 사랑해 줄거야.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해도." 그 직후 그녀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았고, 손을 들어 거울에 반사된 인영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쓰다듬었다. "특히 윌리엄이라면 말이야. 그 아인 참아내 줄거야." 그녀는 웃었지만, 부서져버린 울먹임이 웃음 소리 사이로 흘러나왔다. "추한 내겐 너무 과분한 아이야. 하지만 사랑해, 그 아이만큼은 놓아줄 수 없어."

"엄마-"

"나가!!"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이 욕실 안을 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처럼 격노와 멸시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앞으로 남겨진 것이라곤 동전 한닢도,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녀의 막내 아들 뿐이었다.

그녀가 소리친 대로, 그는 욕실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갔다. 너무 오래되어 다 헤지고 실밥이 떨어져 나오는 이불 아래로 기어들어가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누웠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배는 배고픔에 울어대고 있었고, 머리는 끊임없이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II.


두 눈을 떠 사무실의 천장을 바라봤다. 아직 진정제의 효과가 남아있는 잠의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박였다. 언제나처럼 머리 옆으로 둔한 통증이 느껴져 몸을 일으키다 조금 주춤한 채로 손을 올려 얼굴을 쓸며 그 고통이 가시길 기다렸다.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이 꿈에서 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지만, 비어버린 탄창으로 얼굴을 갈기는 건 최선의 방법도, 꿈에서 깨기위해 그가 쓰곤 했던 방법도 아니었다.

경고 신호처럼 잔뜩 성난 발소리가 들리고, 미처 누구의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임스는 가죽 의자에서 끌어올려져 등 뒤의 벽으로 밀어붙여졌다. 어두운 두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가늘게 뜨인채로 무서운 빛을 띄고 있었다. 머리 위로 수십개의 망치가 내려찍는 듯한 끔찍한 두통이 잇달아 심해지고 있었지만, 태연한 척 웃어보이려 억지로 입술 끝을 밀어올렸다. "또 뭐가 맘에 안드셨던 걸까나."

아서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진채 확고한 선을 그리며, 임스의 멱살을 그러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조로웠고, 조용했으며, 하? 굉장히 차가웠다. "네가 지금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해?"

임스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은 결백한듯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darling."

아서는 마치 뱀의 기어오름처럼 재빨리 눈 앞의 사냥감을 낚아채듯 움직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턱 아래로 차가운 금속의 총구를 들이 밀며, 그의 두 눈이 머리통에 구멍이라도 낼 듯 뚫어지게 노려봐 왔다. "난 내 일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앞으론 너도 그렇게 생각해 두는게 좋을거야."

"넌 지금 내가 그녈 죽여버려서 화가 났을 뿐이지. 안그래?" 임스 또한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 찰나의 순간 아서의 눈에 떠오른 원색의 고통의 빛이 그의 기분을 절벽 아래로 향하게 만들었다. "씨발. 아서, 그건 일을 위해서 였어." 그리고 널 위해서. 그는 덧붙이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대신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을 떠올리는 그의 야윈 몸과, 눈 아래로 내려온 다크써클, 스트레스와 피곤으로 창백해진 두 뺨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는 무겁고 지독한 공기 속에서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장의 실체들이 넌더리날 정도로 배회하고 있었다. 미안해, 모두 괜찮아 질거야, 널 돕고 싶어, darling과 같은. 타인은 절대 눈치채지 못할, 그 이상 쉬울 것이 없을 정도로 간단히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들은 지금처럼,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말이 되어 흘러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들 뒤로, 지금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코브와 표적이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사무실 건물 안으로 조용한 정막이 감돌았다. 일반 비즈니스맨이었다면 사무용 가방을 챙겨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얀 울타리가 쳐져 있는 집을 향해 운전을 하고 있을 이 어둠이 가라앉은 시간에,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선 채로 두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임스는 자신보다 몇 배는 가는 몸의 포인트맨을 상대로, 이 위치에서 벗어날 5가지 방법 정도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저 달래듯 두 손을 올린 상태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어, 아서." 그가 말하자, 턱 밑으로 겨눠져 있던 총구가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 단어들 하나하나가 일격을 가는 것마냥 아서는 뒤로 물러섰다. "방해되는 쉐이드를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님 죽어버린 여자 하나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게 네가 바란 거였었나?"

아서의 주먹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내려쳤다.

입안으로 비릿한 구리의 맛이 느껴지고, 천천히 젖혀진 고개를 들어올려 고여있던 핏덩이를 바닥 아래로 뱉어냈다. "너도 코브랑 같이 미쳐가는구만." 마른 웃음이 터져나왔다. 벽으로 내려쳐진 갑작스런 충격 탓에 그의 두통은 이제 2배가 되어 미친듯이 지끈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맬이야." 아서의 목소리엔 독기가 서려 있었고, 그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맹새하건데, 한 번만 더 그녈 죽이면-"

"그래서, 네 내장이 뽑히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다?" 임스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에 참지 못한 채 거칠게 말을 토해냈다. 머리속에서 그려지는 정신적 형상은 이미 그의 기분을 잡칠때로 잡쳐놓고 있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였다고? 헛소린 집어쳐, 아서. 넌 네 손으로 그녀를 묻었어. 근데 이제와서 다시 붙잡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코브가 타국으로 도망가야만 했던 그때, 맬의 장례식을 준비했던 것은 아서였고,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던 것도 아서였으며, 맬의 끔찍한 자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코브를 꺼내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온 것 또한 아서였다. 임스는 맬이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였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서에게 있어서 어머니이자 친누나와 같은, 가족과 같았던 존재였다라는 것도, 조용한 힘의 허식 아래 언제나 코브의 일로부터 아서를 격려하고 지지해 주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를 상처입혔다는 것 또한.

그리고 그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임스를 괴롭혔다. 아서는 그녀의 프로젝션을 죽이기 보다는 그녀에게 고문당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치부해 버렸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페이크맨이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틀리지 않은, 반박할 수 없는 그의 말에 아서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내가 알아서해." 짧게 한마디만을 내뱉고는 바로 홱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임스는 벽에 기댄채로, 입안을 가득 채우는 피의 비릿함과 함께, 그제서야 흐릿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아서의 주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 옆으로 무딘 동통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III.


방 안을 가득 채운 섹스와 땀 냄새에, 임스는 눈을 뜨지 않았어도 이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속으로 신음을 삼키고, 옆으로 돌아눕자, 침대의 스프링이 무게중심의 틀어짐에 삐걱거렸다. 샤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 외의 한 명이 더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숙취로 쿵쾅거리는 끔찍한 두통에 이를 악물고 버티며, 두 눈을 비집어 열었다.

그녀는 이미 일어나 있었고, 한손으로 턱을 괸채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좋은 아침이예요, 멋쟁이."

임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같이 타오르는 붉은 머리, 모래시계와 같이 완벽한 곡선의 몸, 귀엽게 자리한 주근깨와 가느다랗고 긴 다리. -그녀는 남자라면 누구나 목숨을 걸고서라도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여성이었지만, 그가 기억하는 지난 밤의 일이라고는 완벽한 백지. 그나마도 뇌를 직격으로 울려대는 끔찍한 고통이 과음했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상큼한 아침 인사에 우스갯 소리라도 들려주려 입을 열려했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숙취로 인한 그르릉거림 뿐이었다. 우스꽝스럽게도 베게 위로 얼굴을 푹 파묻어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사지를 붙잡아 마구잡이로 뒤틀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입안으로 죽어버린, 썩어버린 무언가를 쑤셔넣고, 머리 위를 쇠꼬챙이로 찍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그래. 술을 너무 과하게 마신 게 틀림없었다.

그의 옆으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붉은 머리의 그녀 -이름이 뭐였지? ..뭐든 간에 상관없었다. 기억하려 하기엔 머리가 깨질것 같았으니까. - 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주워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혹여나 사라진게 있진 않을까 궁금했다. : 분개한 비명소리와, 경멸의 비웃음, 그리고 머리속을 난도질시키는 쾅하고 닫히는 방문의 소음까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침대의 메트리스가 다시 움푹 꺼지며, 머리 위로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서, 뭐예요, 그 남자 유부남? 아님?"

임스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어젯 밤 내내 당신의 머리속에 있었던 남자."

3배로 부풀어오른 혀가 목구멍을 틀어막아 숨이 답답해져 오는 것 같았다. 메스꺼움과 죄책감. "무슨 소리야."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경멸도, 비웃음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짙은 녹색이라는 사실을 임스는 멍청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찾아간 바에서 그녀에게 빠진 그 이유를 기억해냈다. -다크 브라운 대신 녹색의 눈동자, 붉은 머리, 그리고 아름다운 굴곡의 몸, 그녀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내 이름은 스텔라예요, 아서가 아니라."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임스의 가슴 안의 무언가를 꽉 짓눌렀다.

- 아서. 아서.

그 이름이 떠오른 그 순간, 얼음송곳이 사방에서 관자놀이를 꿰뚫는 것 같았다. 임스는 욕실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아 차가운 유리문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크브라운의 눈동자와 아름다운 선의 몸, 농담이라고는 모르는 냉담한 어투와 죄스러울 정도로 딱 맞는 그의 쓰리피스 정장.

아니, 사랑스러운 소녀와 가족을 이루고 한 곳에 정착하여, 아내를 가짐에, 결혼이라는 안정된 관계를 맺음에, 그 안에서 위안을 얻을 단 한 명의 포인트 맨을. -이 모든 것들이, 15개의 나라에 걸친 현상수배범이자, 자신의 것이라곤 없는 수천개의 얼굴을 가진, 호텔방에 머물며 그렇다할 일정도 정해진 계획도 없이 떠돌아야 하는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루어 줄 수 없었다.

임스는 두 눈을 감았고, 그 사이로 이미지들이 떠돌았다. 꿈의 2단계, 호텔의 로비에서 아리아드네(귀엽고, 젊고, 타고난 능력의 아리아드네, 그녀의 그 사랑스러움은 그녀를 미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조차도 허락치 않았다)에게 키스하던 포인트 맨(그의 아서, 그의 달링, 그의 상실) - 역류하는 메스꺼움을 집어 삼키고,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움켜 쥐며 잊으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인셉션 그 후로 두달이 지난 지금도, 두 눈에 그의 모습을 각인시킨 그 후로 7년이 지난 지금도. 아서를 잊는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했다.





- - - - -




휴대폰에서 날카롭게 울려대는 벨소리가 그의 두 눈을 달궈진 꼬챙이로 찌르듯 지겹게 보채고 있었고, 임스는 신음을 흘리며 손을 더듬어 테이블 옆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서, 화면에서 반짝이는 글자에 두 눈을 깜박이며, 혹여나 환각이 아닌지 확인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의 휴대폰 화면에 찍히는 그 이름은 낯선 것이었으니까.

"여보세요?"

"임스."

그는 옆에 놓여진 토템을 집어 들어, 손가락 마디 사이로 굴렸다. 한 번, 두 번. "아서."

"아리아드네와 내 앞으로 일이 들어왔어. 페이크맨이 필요해. 히말라야에 가본 적 있어?"







IV.


"..불가능해, 코브. 너도 알잖아. 다음 달은.."  

죽는다. 임스는 확신했다. 머리 위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모루에 두개골이 박살나는 듯한 통증과 함께 가까스로 깨어났다.

"임스는 아직 자고 있어. 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오 주여. 그래 물론 아서라면 이 빌어먹을 좇같은 아침 시간에 일어나 코브와 통화하고 있는 게 당연할거다, 그래 물론. 머리 속을 쿵쾅쿵쾅 울려대는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전에도 두통은 있었지만, 그건 단순한 스트레스성이거나 뭐 그런 종류의 것이었고, 이번처럼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음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귓구멍으로 뇌가 흘러나와 동시에 증발 되버리는 기분이랄까. 시트 위로 피부가 스치는 소리는 마치 머리 옆으로 나사못을 박아대며 낄낄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려왔고, 그에 더해 지독히 쑤셔대는 아픔은 머리에서부터 온 몸으로 퍼져, 전신의 신경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이건 진짜 생지옥이었다. 지금 당장 화장실이 급하지 않음에 신에게 감사 기도까지 드려야할 판이었다. 무감각한 두 다리를 붙잡힌 채 침대 아래로 끌어내려져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그랜드 피아노에 폭삭 익어버린 멜론 마냥 뇌가 개박살나는 듯한 착각까지 느낄 정도였으니까.

바로 옆에서 꿰뚫는 총성과 같은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햇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는 머리 위까지 시트를 끌어당겨 덮고는 끙끙거렸다. 왜냐면 씨발 이건 진짜 졸라 병신같은-

"임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 몸을 경직시켰다 -사실 이름이라기 보단 그냥 뭉게진 소리처럼 들렸다- 방안엔 다시 축복의 어둠이 깔렸고, 얼굴을 덮고 있던 시트가 거둬지는 동시에, 이마 위로 반갑기 그지 없는 시원한 손이 내려앉으며 익숙한 손가락이 감긴 눈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임스, 뭐야. 왜 그래?"

"낮춰." 잔뜩 가라앉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았다. 순간 찾아온 고요함으로, 아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 모습을 상상했다.

"낮춰?"

"목소리. 머리. 깨질것 같거든. Darling.." 마지막 한 단어는 거의 말이라기 보단 처량맞은 소리가 되어 나왔다. 마치 아서 -그의 이례적인 포인트맨- 의 말이 푸딩에 박히는 건포도마냥 그의 머리 속을 뚫고 박혀들어가는 것처럼, 그 안쪽에선 여전히 수십마리의 코끼리 떼가 힘차게 발을 구르며 뇌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그의 위 어딘가에서, 아서가 작게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임스는 별로 내키지 않는 그 소리에 눈가를 찌푸리려 했지만, 곧이어 이마 위로 다정한 입술이 떨어져 내렸다. "곧 돌아올게." 그의 중얼거림에 부드러운 입술이 피부 위를 스치고, 임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볼품없이 베게 위로 다시 얼굴을 파묻는 것 뿐이었다. 아서가 어디로 가든 뭘 하든 지금 당장은 신경 쓸 기력도 없었다. 이 두통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방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며 거실에서부터 들어오는 빛줄기가 끊어졌다. 임스는 들리지 않게 될때 까지 조용히 아서의 발자국 소리를 세었다. 그건 그에게있어 아서가 어딜 향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침서같은 거였으니까.  -침대에서부터 문 앞까지 여섯 발자국, 침실 문에서부터 소파까지 일곱 발자국, 소파에서부터 TV까지 네 발자국,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금 상태로 그들의 아파트의 모든 공간을 떠올리기에 그건 너무 많은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손이 뒷목으로 내려앉고, 잔뜩 뭉쳐진 근육을 상냥히 주물러왔다. 다시금 더해지는 무게에 침대 시트가 내려앉으며, 언제나 그 손길에 기대곤 했던, 아서임이 분명한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넘겼다. "이리 와."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조용한,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단조로운 명령조 아래로 살짝 걱정이 묻어져 나왔다. 망설임없이, 임스는 무거운 몸을 이끌어 아서의 무릎 -베게따위와는 비할바 없이 훨씬 좋은- 그 위로 머리를 얹혔다. 빌어먹을 뇌는 여전히 질릴 정도로 윽윽거리길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마 위로 차가운 수건이 내려 앉자, 그는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아서의 가는 손끝이 정확히 그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눌러왔을 때, 임스는 모든 생각을 멈췄다.

"으으음.."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라곤 이게 전부였고, 아서가 머리 위를 마사지하듯 조물락거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는 분명 목을 울려 가르릉거렸을 거라 확신했다. 한숨을 내쉬고, 아서의 몸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 앞에 드러난 따뜻한 피부 위에 입술을 눌렀다. "좀 더?"

그는 코웃음 쳤고, 그건 또 그것대로 기품있어 보였다. "넌 진짜 구제불능이야."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V.


"여자애는 가만 놔둬."

그의 오른팔은 부러져 있었고, 호흡조차 태워버릴 정도의 아픔에 갈비뼈 또한 부러져 나간것 같았다. 적어도 한 5개 정도. 가슴 앞으로 길게 찢어진 지독한 열상 위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시야가 흐린 걸로 봐서 머리는 뇌진탕이라도 일으킨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더러운 바닥 위로, 한 쪽 얼굴이 핏물로 얼룩진 그의 작고 사랑스러운 필리파가 보였다. 그녀가 두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보이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괴물들에, 그녀는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윌리엄 토마스 임스는 두려움을 느꼈다.

"네 녀석들이 원하는 건 나 아니던가." 뒤를 붙잡고 있는 깡패자식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크고 냉정한 톤으로 말했다. 심장은 그의 바스러져버린 갈비뼈 사이에서 스타카토를 연주하듯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만약, 만약 필리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는 다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을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하는 건 나 하나일테니 그녀는 놔두라고! 이 개자식들아!"

마치 하나의 몸으로 연결된 꼭두각시 인형들 마냥 그들은 동시에 돌아섰고, 그의 요구대로, 고맙게도 바들바들 떨어대는 그녀를 저 멀리 구석으로 밀어넣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로 하나둘씩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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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리가 마치 그들의 타켓이라도 되는 마냥, 그들은 끊임없이 한 곳만을 공격했다. 마치 머리뼈를 갈라 무언가를 집어넣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임스는 이 후에 과연 머리뼈가 남아있을 지에 대해 확신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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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스 삼촌," 필리파는 숨을 집어 삼켰고, 그녀의 눈가로 눈물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임스 삼촌!"

씨발, 빌어먹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임스는 어린 소녀에게로 기다시피 다가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닦아주었다. 오래 전 아서가 했던 그대로. 물론 그 때의 눈물은 납치된 공포를 향한 것이 아닌 쏟아진 메니큐어를 향한 것이었지만. "쉿, dove, 쉬-" 그는 속삭였고,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필리파의 창백한 얼굴 위로 한 줄의 검붉은 선이 남겨졌다. "괜찮아, 곧 괜찮아 질거야."

거짓말을 했다. 임스는 그녀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어쨋든 계속해서 말했다. "괜찮아 질거야, 필리파. 괜찮아 질테니까, 알았지?" 머리가 무거워지고, 미처 생각기도 전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딱딱한 바닥 위로 등이 닿고, 그녀의 청바지로 덮힌 다리 위로 머리가 떨어졌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그의 팔은 이미 축 쳐진채 힘조차 줄 수 없는 상태였다.

"임스 삼촌," 필리파는 속삭였다. "일어나요. 제발, 일어나요."

그는 할 수 없었다.







I.


"뇌동맥류."

아서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단호했고, 그의 말은 앞 뒤를 잘라먹은 채 중요 부분만을 하나의 음절마다 강조하듯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너무나 차가워져 있었다. 그는 턱을 굳게 다물고, 눈앞의 의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대머리에 살이 오른 안경 쓴 남자를 그의 눈에 담긴 격렬한 긴장감 하나로 먼지로 만들어버리고 말겠다는 것처럼.

불쌍한 그 남자는 조금 망설이며 말을 이었고, 당황스러움에 검진표를 손 안에 꽉 그러쥐었다. "그렇습니다. 데이비슨씨. 아마도 직접적 두부 외상에 의한 혈관의 염증과-"

"설명은 됐습니다." 아서가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코브는 걱정스런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단번에 무시당했다. "깨어날 수 있습니까." 그건 질문이라기보단 평서문에 가까웠고, 톤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위협적이었다. 의사는 뒤로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적다." 눈을 가늘게 뜨며, 또다른 메말라버린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얼마나 적은 겁니까."

침묵은 남자의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한 의미의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서의 어깨는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그가 반걸음 앞으로 내딛자, 코브의 손이 마치 그의 포인트맨이 의사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것을 막기라도 해보려는 듯 들어 올려졌다. "난 그딴 예측따윈 믿지 않아." 그의 목소리엔 모든 분노와 절망이 녹아 있었다. "절대 믿을 수 없어."

"아서-" 코브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아서의 돌아선 잔뜩 날이 선 어두운 눈동자에 할 말을 잃어버렸고, 아서는 몸을 돌려 성큼 성큼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버려진 강아지와 같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필리파의 곁을 지나,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아리아드네와 그녀의 약혼자를 지나쳤다.

병원 침대 위, 임스의 가슴은 천천히 오르락 내리락 움직이고 있었고, 두 눈은 세상을 향해 닫혀진 채, 그의 의식은 깊은 잠에 갇혀 있었다. 어느 무엇으로도 그를 깨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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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섯달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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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의 의식을 뒤덮은 장막을 찢어냈을 때, 그가 기억하는 하나의 단어는, 아서, 아서, 아서. 단 한 남자의 이름 뿐이었다. 미쳐버린 정신으로부터의 단 하나의 구원이자, 그의 의식 안에 가두어둔 불멸의 영원.

그의 눈이 천천히 열리고, 몇 달간의 잠에서 깨어난 그의 시야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남자의 모습이었다. -고결하고 지적이며,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 그의 darling.

임스가 깨어났을 때, 두통은 없었다. 대신 그의 앞에는 아서가 있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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